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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열의 세계관

           서론 | 1장 | 2장 | 3장 | 4장 | 5장 | 6장 | 7장 |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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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장 / 세계관의 분열

- 기세는 개혁주의의 외적 표현이다

   앞에서 기세의 태동 배경과 발전 과정을 살펴보았다. 물론 앞서 말한 것만으로 기세 전체를 다 다루었다고 할 수 없고 또한 그것은 개혁주의 관점을 정리한 것이기에 타 교단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의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앞 장에서 논한 기세는 발전 과정 중에 있는 하나의 모습일 뿐 아직은 온전한 시스템을 갖춘 기세라고 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앞서 논의된 기세는 기세로서의 대표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무엇보다 기세는 개신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개혁주의의 교리를 충분히 전제하였고 그 교리에 충실한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기세의 틀은 개혁주의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에 대한 설명 역시 개혁주의의 전통에 충실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기세란 기독교 교리의 표현이며 교리의 외적 모습이기에 화란의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기세는 개혁주의의 내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외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기세의 문제들

   그런데 개혁주의 전통과 교리를 반영하고 있는 기세는 많은 모순들로 점철되어 있다. 첫째로 기세가 주장하는 ‘문화적 낙관론’은 성경적이지 않다. 기세는 이 땅의 문화적 열매가 하나님나라에 유입되는 것이므로 문화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세의 주장대로라면 교회는 문화적 업적을 위해서도 사역해야 하며 성도 역시 문화를 중대한 목적으로 삼게 되는데, 이는 교회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다. 교회는 문화를 문화를 목적으로 사역하지 않고 단지 문화를 통로로 삼아 사역해야 한다.

   둘째로 기세는 문화명령을 과대하게 취급한다. 월터스는 창조의 정점이 문화명령에 있고, 인간은 문화명령의 수행을 위해 지음 받았으며, 타락은 문화명령의 수행이 지체되는 것이고, 구원이야말로 문화명령을 완전히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을 너무 그리스도 유일론으로 보지 말고 문화명령의 성취라는 문화사적 관점으로도 볼 것을 주문한다. 이는 월터스의 사설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의 주장을 따르게 되면 그야말로 문화명령이 창조의 핵심이 되고 구원의 목적이 되어 성경의 본질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셋째, 문화를 ‘명령’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다. 현재의 기세의 핵심에는 문화명령이 자리잡고 있다. 어차피 기세란 세속적 문화의 위협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고 교회가 문화에 대해 올바른 대응을 하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관점이다. 그러다보니 문화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점에 초점이 있다. 이 점에서 기세는 문화명령을 문화에 대한 중대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며 세계관의 중대한 핵심인양 다루고 있다.

   하지만 기세는 문화명령을 말 그대로 명령으로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왜곡을 자초하고 있다. 월터스는 문화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종말적으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화명령은 명령의 의미가 아니다. 문화가 명령이 되면 문화는 인간의 임무나 중대한 목적으로 격상한다. 그럴 경우 인간은 문화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며 창조와 역사와 하나님의 모든 섭리조차 문화를 목적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문화는 인간이 완수해야 할 목적이 아닌 인간의 ‘본질’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문화적으로 존재하며 문화적인 존재방식을 갖고 살게 만드셨다. 인간이 땅에서 자연을 계발하여 문화를 생산하며 사는 존재가 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근거로 문화를 생산하고 문화적으로 사는 존재라는 정체성(Identity)을 ‘선포’하는 말씀이지, 문화를 생산하는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문화명령과 대명령의 분열

   기세는 구원 못지않게 문화의 의미를 격상시키려고 무척 애를 쓴다. 그래서 제시하는 것이 문화명령(창1:26-28)과 대명령(마28:18-20)을 병행시키려는 논리다. 기세는 교회가 대명령 중심으로만 사역해서는 안되며 문화명령을 병행해서 성취해야 한다며, 두 명령은 마치 수레를 끄는 두 바퀴와 같아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같이 두 명령을 병행시켜아 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주장이다. 왜냐하면 문화명령은 대명령과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명령 안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대명령을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 여기서 앞 부분의 말씀을 보면 대명령이 선포되는 전제가 잘 나타나 있다. 즉 대명령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8절)라는 말씀을 전제로 하여 선포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제는 문화명령을 선포할 때의 전제와 상당히 다르다. 문화명령은 오직 땅을 전제로 선포되었다. 성경은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에 있는 것을 다스리라”(창1:28)고 명하며 문화명령의 범주가 단지 땅에 국한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대명령의 범주는 이와 다르다. 대명령은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아 명하셨다. 그러므로 대명령은 문화명령보다 더 상위적이고 더 완전한 명령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대명령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0절)고 명령하셨다. 주님은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은 문화의 부분이나 삶의 부분을 제외하고 영혼과 구원의 부분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삶과 문화와 인격과 영혼을 포괄하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행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대명령은 문화명령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이며 그보다 훨씬 크고 신령한 내용들을 명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화명령과 대명령은 서로 병행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명령은 주님의 대명령 안에서 완전히 폐해지고 다시 회복되며 더욱 온전케되는 것이다. 대명령이란 영혼 구원에 대한 부분만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문화의 부분을 뺀 반쪽의 명령을 하는 것도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명령은 그 자체로 땅과 하늘의 모든 것, 교회와 문화를 포함하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대명령을 지키는 자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지키는 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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