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스사역

       
     
 분열의 세계관

           서론 | 1장 | 2장 | 3장 | 4장 | 5장 | 6장 | 7장 |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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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4장 / 교회의 이원론

- 기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기세는 비록 문화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세우는데는 실패하였지만 그렇더라도 기세의 시도 자체는 정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교회 역사에서 기세만큼 문화의 중대성을 제대로 인식한 일이 없었고 그만큼 문화의 문제를 제대로 다룬 적도 없었다. 기세 운동이야말로 교회가 세상 문화에 대해 가져야 할 건강한 관점을 찾고자 했던 대단히 긍정적인 운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기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필요하다 하겠다. 첫째로 기세는 교회가 문화의 문제를 해결할 세계관이 없다는 사실을 올바로 통찰하였다. 물론 세상 문화의 위세에 놀라 뒷걸음치며 알게된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기세가 그 점을 가장 먼저 인식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둘째로 기세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원론의 문제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성하였다. 교회가 이원론의 문제에 빠져 있다는 점은 교회의 커다란 맹점이다. 이원론으로 인해 교회는 세상과 문화와 현실에 대한 균형있는 시각을 갖지 못하여 도리어 세상에서 소외되는 일을 자초하였다.

   셋째로 기세는 창조론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찾고자 하였다. 기세는 그 동안 교회가 구원 중심의 시각에 빠져 창조와 세계에 대한 인식과 책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반성하였다. 그래서 기세는 창조와 구원간의 균형있고 통합적인 시각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같은 관점 역시 과거의 교회가 인식하지 못했던 중대한 것이었다. 넷째로 기세는 교회가 창조, 땅, 문화, 현실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성경적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교회가 세계 안에서 방관자가 되거나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일없이 사회문화적 책무를 다하는 균형있는 교회가 되도록 돕고자 하였다.


- 문화관의 규범이 없는 교회

   기세의 주장처럼 교회는 전통적으로 문화의 문제에 대해 마땅한 성경의 규범을 갖지 못하여 왔다. 그러면 그 동안 교회는 문화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이에 대해서는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가 그의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니버는 역사적으로 교회의 문화에 대한 태도에는 5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다. 니버의 설명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문화를 배척하는 입장 - 신앙과 문화를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문화 자체를 악하고 죄된 세상의 것으로 보며 문화를 배척함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터툴리안이나 톨스토이가 이런 분리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2. 문화와 일치하려는 입장 - 신앙과 문화를 동일한 것으로 일치시키려는 입장이다. 과거 헬라의 교부들처럼 기독교와 철학을 조화시키려 하거나 신앙과 지식 혹은 세상과 교회를 일치시키는 모습들에서 볼 수 있다. 나치 정권하의 기독교도 이런 부류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3. 문화를 하위로 보는 입장 - 문화를 신앙의 하부구조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인물로서 그는 교회를 하늘의 영역으로, 문화를 땅의 영역으로 구분하며 교회를 상위에 둠으로써 문화에 대한 교회의 지배적 위치를 강조한다.

   4. 문화와 갈등관계에 있는 입장 - 문화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입장이다. 루터가 이 입장을 대표하는데 그는 신앙과 문화는 세상 끝까지 서로 갈등과 긴장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 루터에게 세상 문화란 어쩔 수 없이 견디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고통이 된다.

   5. 문화를 변혁하려는 입장 - 신앙으로 문화를 변혁하려는 적극적인 입장이다. 칼빈이 이를 대표하며 신앙이 세상 문화를 변혁할 수 있다고 보고 땅에서 하나님나라가 성취되도록 만들고자 한다. 기세론자들도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한다.

   이렇게 교회가 문화에 대해 가졌던 태도를 보면 그것은 문화의 대해 보일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다 보여준 것과 같다. 교회는 문화에 대해 배척, 일치, 군림, 갈등, 변혁 등 마치 카멜레온같은 모습으로 응대하였다. 그만큼 교회는 문화에 대한 일관된 입장을 갖지 못하고 시대적 정황에 밀리거나 신학적 배경에 의해 제각기 다른 문화관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런데 문화에 대한 성경적 대안이 없기는 니버도 마찬가지였다. 니버는 자신의 책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위의 5가지 유형 중 실존상황에 따라 하나의 유형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며, 문화에 대한 단일한 규범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니버는 결국 교회가 이제껏 되풀이 했던 시행착오를 계속하거나 자신이 분류한 5가지 유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궁색한 말을 하는 것이다.


- 어거스틴의 이원론

   교회의 문화에 대한 문제는 곧 이원론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가 문화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곧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도 같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문화에 대해 이원론의 관점을 고수하여 왔다. 문화란 세상의 것이요 장차 없어질 것이기에 별 가치를 갖지 못하며 혹은 악하거나 거리를 두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럼으로써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이원론으로 분열시켜 왔다.

   그런데 교회 이원론의 뿌리는 어거스틴으로부터 연원한다. 어거스틴은 교회 안에 이원론을 유입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신학 안에는 헬라의 이원론의 사고가 깊이 담겨 있다. 그는 현실세계에 대한 본질세계의 우위성, 자연세계에 대한 정신세계의 우위성, 감성적인 것에 대한 이성적인 것의 우위성이라는 헬라의 이원적 사고를 수용하였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영혼은 불멸적 실체이고 육체는 질료적 매개물이라고 보며 이성적인 영혼이 육체 속에 거주한다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의 이원론적 사고는 직업과 노동에 대한 인식에서도 나타난다. 헬라사회에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은 상대적으로 정신적 여가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이 상위적이며 농사와 같은 육체 노동이 요구되는 직업은 비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명상의 삶과 활동의 삶을 구분하게 만들었다. 명상의 삶은 영혼의 반성과 기도와 성직에 속한 우월한 것으로 높여졌고 노동이나 농사 등의 활동적인 삶의 대부분은 평가절하되었다. 어거스틴은 농업, 군사, 법, 항해, 무역 등이 바벨론의 산물이며 곧 사라져 버릴 것들이라고 말함으로서 땅의 문화를 육체의 것으로 폄하하였다 .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사고는 그의 국가관에도 스며들었다. 그에게 국가는 육의 영역을 관장하고 교회는 영의 영역을 관장하며, 국가는 인간의 자연적 요구를 추구하고 교회는 영적 요구를 추구하는 것으로 분리되었다. 이는 국가가 땅의 나라에 속한 것이며 교회는 신의 나라에 속한 것이라는 그의 역사관에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리는 다름 아닌 육과 영의 분리요, 시간과 영원의 분리이며 땅과 하늘 그리고 하부적인 것과 상부적인 것의 분리와 같다. 이것은 일견 기독교적으로 보이는듯 하나 그 안에 헬라의 이원론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는 위험스런 것이다.


- 이원론의 근본적인 해결점

   교회가 갖고 있는 이원론의 뿌리는 어거스틴의 구원론 안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어거스틴의 구원론은 이미 이원론에 오염되어 있다. 그의 구원론에는 구원이라는 형태만 존재할 뿐 구원의 내용은 필요치 않다. 즉 그의 구원론은 영혼의 구원이 중요할 뿐 육체의 삶이나 이 땅에서의 현실적인 행위들은 구원받는 것과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분리되어 있다.

   어거스틴의 구원론에서 영혼과 육체는 철저히 분열되어 있다. 그에게는 죄 사함이라는 추상적인 구원이 핵심이며, 죄를 이기거나 구원의 열매들을 맺는 실제적인 삶의 구원은 단지 옵션에 지나지 않는다. 즉 성도는 그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가 사회문화적 삶을 어찌 살든지, 그가 현실에서 어떻게 행하는가에 관계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는 그에게 구원이란 문화적 삶에 관계없이 오직 신앙만으로 받는 것임을 의미하며, 그의 구원론이 신앙과 문화를 분리시키고 있음을 나타낸다.

   여기에 바로 이원론의 근본적인 뿌리가 있다. 이미 구원과 삶, 신앙과 문화가 분열되어 있는 구원론이 바로 이원론의 뿌리다. 그가 주장하는 구원이 오직 믿음만의 구원이다보니 성도의 행위 즉 사회 문화적인 행위들은 이미 구원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믿음이 행위와 분리되어 있고 믿음은 굳이 행위를 온전케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데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같은 구원론은 이원론에 의해 분열된 구원에 다름이 아니다 .

   그러나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에 의하면 믿음은 행위와 같다. '믿음=행위'다. 그에게 영혼의 구원은 삶의 구원과 같으며, 신앙이란 사회문화적 행위까지 구원하는 것이다. 혹여 사회문화적 행위가 불의하면 그런 자의 믿음은 아직 어린 믿음이거나 가짜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구원론에는 이원론적인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신앙은 문화와 일치하고 하늘의 구원은 본질적으로 창조의 땅과 통합한다. 이것이야말로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고, 육과 영이 일치하는 온전한 구원론이며 이원론의 문제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구원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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