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스사역

       
     
 어둠의 예정론

           서론 | 1장 | 2장 | 3장 | 4장 | 5장 | 6장 | 7장 |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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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4장 / 논리적인 문제들

   예정론은 그 교리가 주장되는 순간 대량으로 발생하는 논리적 모순들을 피할 길이 없다. 예정론은 논리적인 면 뿐만아니라 윤리적, 성경적인 관점으로 볼 때도 많은 모순들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예정론은 그런 모순들에 대해 언제나 명쾌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래에서 예정론을 주장할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문제들에 대해 살펴 보자.


- 윤리적인 문제들

①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만든다

   예정론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은혜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예정하셨다고 주장한다. 이는 세상에 악한 자가 존재하고 심판을 받는 최초의 원인이 하나님의 예정에 있음을 가르킨다. 그래서 예정론은 하나님이 악한 자를 만든 악의 창시자요 불의한 존재라는 비난을 불러 일으킨다.

   예정론이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든다는 비난이 일자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응하였다. “두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을 구했다면 한 사람을 구한 것이 은혜이며, 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은 없다.” 이 대답은 어거스틴의 대답이 변명에 불과함을 보여 준다. 만일 어거스틴의 논리가 통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첫째로 물에 빠진 원인이 예정이 아닌 사람들의 죄에 있어야 하며, 둘째로 하나님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쪽만을 구하실 상황이어야만 한다. 그러면 어거스틴의 변명이 통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물에 빠진 원인은 창세 전의 예정에 의하며 그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영원히 빠져 죽게끔 예정하셨고,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구할 여력이 있음에도 짐짓 한 사람을 구하지 않기로 예정해 놓고 계셨다. 따라서 두 사람이 물에 빠진 원인은 예정론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은 일부러 한 사람을 구하지 않은 것도 예정론 때문이니 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면키 어려운 것이다.

   이를 보면 어거스틴의 말이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예정론을 주장할 때는 유기의 원인이 창세 전의 예정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불의하다는 공격을 받자 갑자기 유기의 원인이 인간의 죄에 있는양 발뺌을 하고 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이 마치 예정과 관계없고 하나님이 한 사람만 구한 것만도 다행이라는 듯이 합리화한다. 이러한 억지는 하나님의 유기가 모든 일의 최초 원인이라는 ‘절대 예정론’의 논리를 애써 외면하는 부정직한 것이다. 차라리 예정론이 불의를 나타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칼빈처럼 대놓고 주장하는 것이 솔직하다 하겠다.

② 하나님을 이중 인격자로 만든다

   야고보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약3:11)라며 한 존재가 상반되는 두 인격을 품을 수 없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예정론에 따르면 하나님이야말로 한 마음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내는 두 인격의 존재가 된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아무 이유없이 사랑과 저주의 두 마음을 품고 있고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고 계시니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이중인격자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③ 하나님의 창조를 모독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반드시 선한 창조여야 한다. 그런데 태초의 창조는 하나님 자신과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는 선한 창조일지 모르나, 저주받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저주받은 악한 창조가 된다. 하나님은 저주받을 자의 창조를 예정하시고 그들을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태어난 후와 그들의 사후까지 영원히 저주하시니 그들에게 창조란 지극히 비참하고 추악한 창조일 수밖에 없다.

④ 하나님의 심판을 훼손한다

   예정론이 통용되면 하나님의 심판조차 웃음거리가 된다. 하나님은 아무 근거없이 마음 내키는대로 심판을 하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 본래 심판을 면하고 용서받는 자들은 심판을 면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단지 하나님이 은밀히 정한 주관적인 예정 때문에 예수의 보혈이 주어져 모든 것을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 이는 객관성과 공정성이 결여된 묻지마식 구원이 된다.

   더욱이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으로 살며 죄인으로 죽도록 유기된 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복음을 들어도 믿을 수 없고 회개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고 살다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회개치 않았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는다. 이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두 눈을 다 뽑아 놓고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 없다. 이와같은 공의가 상실된 묻지마 심판을 어찌 심판이라 할 수 있겠는가.


- 논리적인 문제들

① 예정론은 완전한 폭력이다

   예정론은 사람의 죄나 잘못을 보고 예정하는게 아니다. 예정은 인간이 죄를 행하기 전에 결정되며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예정된 상태를 변경하지 못한다. 이는 예정론이 죄나 공의의 문제를 초월하는 절대 우위의 권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예정론에서 중요한 것은 힘의 논리다. 예정론은 가장 힘있는 자가 한 번 정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논리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그 누구도 예정론을 견제하거나 반대할 수 없다.

   예정론은 단지 힘으로 결정되며 힘으로 행사된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이해나 동의를 구하지 않으며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결정된다. 그리고 아무도 그 결정에 대해 알 수도, 따질 수도 없으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체 예정된 결과를 영원히 떠안을 뿐이다. 이처럼 힘의 논리로 일관하는 예정론이야말로 완전한 폭력이라 할 수 있다.

② 예정론은 그리스도 위에 군림한다

   본래 구원이란 오직 그리스도가 원인이 되고 그리스도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아무 조건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예정론의 논리는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을 구원의 원인과 목적으로 제시한다. 곧 예정은 그리스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원인이 되고 훨씬 절대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리스도는 그 예정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보조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이처럼 예정론이 수용되면 그리스도는 물론 복음의 모든 진리들도 예정론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

③ 구원의 순서를 거꾸로 만든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믿으면 그 결과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예정론에 의하면 그 순서는 거꾸로 된다. 예정론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예정된 자에게 구원을 허락해야만 그가 믿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는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논리를 거꾸로 만드는 것이다.

④ 모든 전도와 설교를 쇼로 만든다

   그렇다면 교회가 행하는 전도나 설교는 한마디로 예정론을 위한 쇼에 불과하다. 전도나 설교는 이미 사전에 정해진 각본을 이루기 위한 수순에 불과하며 어떠한 전도나 설교도 예정된 일을 이루기 위한 연출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도와 설교는 오직 예정된 자들을 위한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마치 누구든지 아무나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니 어찌 쇼가 아니겠는가.

⑤ 예정론은 운명론보다 더욱 참혹하다

   예정론자들은 예정론을 운명론이라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서 운명론은 주체가 없지만 예정론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 하지만 주권자와 상관없이 예정론은 운명론보다 더욱 강력하고 더욱 참혹한 결과를 낳고 있다. 예정론에 의해 유기된 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태초부터 영원히 저주만을 받아야 한다. 이게 말이 좋아 예정이지 실상은 어느 운명론보다 더욱 무섭고도 참혹한 운명론이 아닌가.


- 성경적인 문제들

   예정이 선택의 원인일까, 아니면 예수가 선택의 원인일까? 이는 중대한 문제다. 왜냐하면 만일 예정이 선택의 원인이 되면, 예수는 예정의 논리에 갇혀 오직 예정된 자만을 위해 피를 흘리는 ‘제한적 속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예수가 선택의 원인이 되면 예정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의해 결정되며, 예수의 대속은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속죄가 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예수가 선택의 원인이 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일 예수가 아닌 예정이 선택의 원인이 되면 그것은 예수 곧 하나님보다 예정에 우위에 서는 신성모독의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그런데도 예정론자들은 언제나 예수보다 선택을 우위에 둠으로 하나님보다 예정을 우위에 두는 죄를 범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2)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은 범죄한 모든 자에게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또한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하며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음”(고후5:15)을 증언하고 있다.

   베드로도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고 말한다. 즉 유기는 하나님의 본 뜻이 아니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요한 역시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고 말함으로써 예수의 대속이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속죄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듯 성경은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를 말하고 있고 그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예정이 하나님보다 높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보편적 속죄가 되어야만 복음은 인격적으로 전달될 수 있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예정론을 주장할 때 파생되는 윤리적, 논리적, 성경적인 문제들은 너무도 많으나 이 정도 문제를 제기하는 선에서 약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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