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스사역

       
     
 분열의 세계관

           서론 | 1장 | 2장 | 3장 | 4장 | 5장 | 6장 | 7장 |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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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어 / 세계관을 마치며

- 구원 중심의 관점에 모든 혼란의 원인이 있다

   그 동안 교회는 구원 중심의 세계관으로 일관하여 왔다. 그러다 보니 창조의 의미가 소외되고 창조와 함께 땅과 문화의 일들까지 소외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런 구원 중심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위한 것이 바로 기세의 등장이었다. 기세는 구원에 치우친 세계관을 바로 잡기 위해 창조의 의미를 확대하여 구원과 균형을 이루도록 하려 하였고 그 안에서 교회와 문화의 일치를 꾀하려 하였다.

   하지만 기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기세의 시도 자체는 긍정적이고 고무적이었으나 아무래도 구원 중심의 세계관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리라. 기세는 구원 중심의 세계관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본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단순하게 구원 옆에 창조를, 교회 옆에 문화를 병렬시켜 양자를 동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세계관과 문화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그것이 도리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말았다.

   구원 중심의 관점이 창조의 의미와 목적을 소외시켜 온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며 땅과 문화를 소외시켜 온 것도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본질과 핵심을 소외시키는 문제이며 나아가 구원의 목적까지 왜곡하는 큰 문제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구원 중심의 관점은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목적을 유실하여 왔고 그로 인해 성경의 크게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구원 중심의 관점은 창조의 목적은 물론 자신의 목적까지 잃어버린 가운데 단지 첫 창조를 회복하는 과거적 의미에 빠져 자신의 미래적 영광을 저버리고 있는 상황이다.


- 이레니우스의 창조론으로 돌아가라

   성경은 구원에서 시작하여 구원에서 끝나는 책이 아니라 창조에서 시작하여 창조로 끝나는 책이다. 구원을 포괄하는 보다 큰 틀이 창조요, 구원은 창조를 위해 있고 창조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태초의 창조를 회복하는 죄 사함이 핵심이 아니라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는 둘째 창조의 완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구원의 미래적 목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는 한 현재와 같은 구원 중심의 왜곡된 관점은 교정되기 어렵다. 그런 가운데 창조의 본질은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며 성경의 세계관과 문화관을 세우는 일은 더욱 혼란스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제라도 창조와 구원을 일치시켜 그 안에서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얼른 이레니우스의 창조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어거스틴과 칼빈으로 인한 구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레니우스의 창조 중심의 세계관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창조와 구원의 핵심과 목적은 서로 조화하고 일치할 것이다. 또한 교회과 문화의 이원론적 분열은 물론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믿음과 행함의 이원론적 분열의 문제까지 모두 치유되고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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