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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의 예정론

           서론 | 1장 | 2장 | 3장 | 4장 | 5장 | 6장 | 7장 |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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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어 / 예정론을 마치며

- 청함의 구원과 택함의 구원

   성경을 보면 청함의 구원이 있고 택함의 구원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말씀하셨다. 또한 성경은 구원의 문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크고 넓은 문이 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마7:14)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 ”(마7:21)는 점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가르침은 어거스틴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누구든지 청함을 받는 자는 곧 택함을 받은 자요,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이미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에 해당한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그것은 어거스틴에게는 청함과 택함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게는 믿음의 시작이 곧 구원이요 예정의 결과다. 따라서 누구든지 청함을 받은 자는 곧 예정된 택함의 구원을 받은 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에게는 청함의 구원과 택함의 구원이 확연히 다르다. 이레에게 청함의 구원이란 죄 사함을 받아 태초의 아담의 무죄한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며, 택함의 구원이란 태초의 창조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에 온전히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형상의 온전함에 이른 자들은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갈5:22)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된다.(갈6:8) 그리하여 천국은 믿음만 있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열매맺는 자들만이 들어간다는 말씀을 성취한다.(마21:43).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는 이같은 택함의 구원이나 열매맺는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열매맺는 구원을 말하면 그것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라며 몰아붙이기 일쑤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성령의 열매는 행위로 맺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을 좇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방도가 없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함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지 못한 청함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아마 이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이 무슨 재주로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는가.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도데체 무슨 말인가 하며 곤란함을 토로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교회는 아직도 이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초의 도보는 기가 막히게 가르치면서 조금만 어려운 말씀에 들어가면 구원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며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많은 교회가 아직도 택함의 구원에 대한 지식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는 길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좁고 협착한 영의 길을 알지 못하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택함의 구원에 무지한 상태에서 청함의 구원에만 매달려, 택함의 구원을 제거하고 외면하고 있는 것이 교회의 영적 현실이다.

   어거스틴도 바로 이와 같은 자였다. 그는 청함의 구원을 받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다 보니 청함과 택함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였고 좁고 협착한 구원의 길에 대하여는 전혀 무지한 상태였다. 이같은 수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의 시작이 곧 구원이라고 외치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으며 그 구원은 영원보장된 은혜의 구원이라고 외치는 일 뿐이었다.


- 자유의지의 제거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그 즉시로 청함과 택함의 구원을 받는다고 했던 어거스틴의 구원론을 위협한 것이 바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믿음을 시작하기로 결심할 때 그 위에 은혜의 구원이 부가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유의지에 대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어거스틴에게 심각한 위협이다. 만일 펠라기우스의 주장대로라면 구원이란 그야말로 자유의지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인간의 능력으로 쉽게 성취할 수 있는 행위의 구원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유의지가 믿음의 시작에 관여할 수 없도록 막아야 했다. 그것을 막지 못하면 구원은 은혜의 구원이 아닌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 구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연유로 어거스틴은 자유의지가 믿음의 시작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완전하게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시작에 자유의지가 관여할 수 없게 만들었고 거기에 100% 하나님의 의지만 남게 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예정론이다.


- 자유의지와 은혜의 조화

   청함과 택함의 구원이 구분되어 있는 이레니우스에게는 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자유의지와 은혜가 서로 자리다툼을 벌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청함의 구원의 영역에서 자유의지를 침해하거나 제거하지 않으시며 은혜를 바탕으로 자유의지의 회개를 촉구하고 부르신다. 이 청함의 구원에서 자유의지는 구원에 대한 결정권이나 우위권을 갖지 못한다. 단지 구원을 시작하든지 말든지를 할 수 있을 뿐이다. 혹여 자유의지가 믿음을 시작한다해도 구원의 길은 이제 출발선에 있는 것에 불과하고, 자유의지가 은혜를 거부한다해도 은혜의 초청은 언제나 쉬지 않고 계속된다.

   청함을 받은 성도가 택함의 구원에 이르려면 말씀과 성령의 연단을 받아 온전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과 결정권을 갖는 것은 역시 은혜다. 은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유의지를 조정하거나 제거하지 않으며 자유의지가 회개하고 거듭나며 깨닫고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성장의 과정이야말로 이레니우스가 말한 구원의 핵심 과정이다.

   그런데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도데체 어느 정도 성장하고 얼마나 성화되어야 구원받을만큼 되는 것이냐고 한다. 그것은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의문일 뿐이다. 그것은 그 안에 들어가보면 안다. 예를 들어 쟌느 귀용이나 앤드류 머레이처럼 그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느 위치에 어떻게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은 아직 그 핵심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안에 감추어진 많은 내용들도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것이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멀리 하게된 이유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고, 눈과 귀에 성령의 할례를 받고 마음 눈이 밝아지게 되면 그 모든 것을 밝히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온전한 구원론인 것을 말이다.


- 예정론의 퇴치

   만일 어거스틴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의 핵심과정을 제대로 알았다면 예정론 따위는 파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의 구원론 안에서는 은혜가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 또한 자유의지를 이끌어 변화시키며 끝내는 자유의지가 치유되어 은혜에 순복하고 일치하게끔 만든다. 이러한 구원의 핵심과정에 무지했던 어거스틴은 믿음의 시작에 집착하여 자유의지를 소멸시켰으며 끝내는 은혜마저도 폭군적인 형태로 만들어 예정론이라는 기형적인 구원론을 배태시켰다.

   따라서 교회가 예정론이라는 괴물을 물리치려면 먼저 구원의 핵심과정을 온전히 조명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레니우스의 창조의 본질을 제대로 조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레니우스의 창조론의 핵심이 먼저 증거되어야 한다. 그 후에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이 제대로 조명된다면 예정론이라는 괴물이 다시 교회에 발을 붙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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