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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의 예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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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장 / 예정론의 뿌리

- 예정론의 뿌리는 어거스틴의 구원론에 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예정론에도 원인이 있고 그 배경과 뿌리가 있다. 예정론은 왜 나오게 되었을까. 그 근본적인 뿌리는 터툴리안의 구원론으로부터 연원한다. 터툴리안은 구원이란 인간이 태초의 아담처럼 무죄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구원이란 태초의 아담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채무를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다.

   따라서 터툴리안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여겼고 죄 사함의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터툴리안의 구원론은 어거스틴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어거스틴 역시 죄 사함의 세례를 구원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처럼 죄 사함을 구원으로 인식하게 되면 구원은 너무도 쉽고 단순한 것이 된다. 구원은 단지 믿는다는 고백 하나로 충분하며, 믿음을 시작하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게 된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에게는 믿음을 시작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 여겨졌다. 어거스틴은 ‘믿음의 시작’이야말로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중대한 핵심이 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 예정론의 뿌리는 믿음의 시작에 있다

   ‘믿음의 시작’이 구원론의 핵심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예정론의 씨는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인간이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에 완전한 구원이 공짜로 주어진다는 이같은 구원론은 인간의 의지 여부가 구원의 중대한 변수로 등장할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면 자유의지는 구원을 결정하는 주도권을 갖게 되며 은총은 그저 자유의지를 추종해야 하는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이 ‘믿음의 시작’을 사이에 두고 논쟁의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믿음의 시작이 자유의지에 의한다고 공격하였고 어거스틴은 오직 은총이 믿음을 시작하게 만든다고 방어하였다. 이렇듯 두 사람의 대결은 은총 대 자유의지 중에 어느 것이 ‘믿음의 시작’에 대한 주도권을 갖느냐에 대한 한판 승부였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믿음의 시작’에서 자유의지가 개입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해야 했다. 만일 거기에 자유의지가 조금이라도 개입하면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개입하는 문제로 이어져 은혜구원이라는 의미가 퇴색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타락한 인간의 의지가 믿음의 시작에 개입할 능력이 없다고 못박고, 오직 하나님의 의지만이 인간이 믿음을 시작하도록 만든다는 예정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 누가 승리해도 모순은 남는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호하기 위해 싸웠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을 수호하기 위해 응전하였다. 하지만 은총이나 자유의지는 어느 것 하나만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둘은 통일과 조화 그리고 일치를 이루어야 하며 둘 중 하나가 무너질 경우 둘 다 무너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만일 펠라기우스의 주장대로 자유의지가 믿음을 결정한다고 치자. 그러면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손상받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타락하고 나약한 의지에 춤을 추게 되고, 변심과 배반을 반복하는 인간의 의지로 인해 구원 여부도 불투명하게 된다. 더불어 구원이 인간의 의지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단성마저 드러난다.

   반대로 어거스틴의 주장대로 은총에 의해 믿음이 주어진다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주권은 높여지나 인간의 의지가 말살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와 함께 필자가 앞 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위협하는 논리적 문제들이 대량으로 발생한다.


- 은총과 자유의지가 조화하는 길

   그렇다면 과연 어거스틴이 갖는 예정론의 모순을 피할 길은 없는가. 또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이레니우스의 창조/구원론 안에 존재한다. 사실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은 어거스틴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난해하고 어려워 사람이 배우기 어렵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총이 공존하는 길이 열려 있다.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은 ‘죄 사함’이나 ‘믿음의 시작’을 구원의 핵심이 아닌 초보 단계로 취급한다. 그래서 믿음의 시작에 있어서 얼마든지 자유의지의 개입이 가능하며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의지만 있으면 믿음을 선택하여 구원의 첫 걸음을 시작할 수 있고 본다. 이레니우스의 구원에서 ‘믿음의 시작’은 구원의 크고 넓은 문(마7:13)에 들어서는 부르심의 초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의 구원에서 핵심 과정을 통과하는 일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히6:3) 그러므로 이레니우스의 구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구원의 부르심에는 응답할 수 있으나 구원의 택하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가 절대적이다. 성령께서는 자유의지를 말살하지 않으면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가능한 구원의 길로 믿는 자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레니우스의 구원에서 은총과 자유의지는 서로 아름답게 조화한다. 은총은 자유의지를 말살하지 않고 그 존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유의지를 이끌어 성령께 순종하도록 치유하고 온전케 하신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 없이는 아무도 구원의 핵심을 통과할 수 없으며 오직 은혜로만 그 일이 가능함을 깨닫게 하신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러한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어거스틴의 예정론이 득세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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