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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 예정론을 해결해야 구원을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앞서 창조론과 구원론을 논증하였다. 필자가 논증한 창조.구원론은 초대교회 때 사도들이
가르친 창조/구원론이자 이레니우스에 의해 신학적으로 제시된 창조/구원론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창조/구원론을 가르치는 교회는
찾기 어렵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단지 터툴리안과 어거스틴에 의한 창조/구원론을 가르칠 뿐이다.
그런데 이레니우스의 창조/구원론을 가르치든 혹은 어거스틴의 창조/구원론을 가르치든 간에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정론에 대한 부분이다. 예정론은 자신의 논리만을 구원의 제일 원인으로 그리고 구원의 최종
원인으로 삼는 교리다. 그리하여 자신만을 구원의 유일무이한 규범으로 제시하며 자신외에 그 어떤 구원의 논리도 허락치 않고 있다.
이러한 예정론이 전제되면, 이레니우스건 혹은 그 누구의 논리라 할지라도 모든 구원의 논리는 일순간에
제의미를 잃고 예정론에 흡수되어 버린다. 그 어떤 놀라운 구원의 진리라 해도 예정론 앞에서는 무력하게 되어 예정론의 하부논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해 제대로 말하려면 먼저 예정론의 실체와 본질을 밝혀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어떤 논리를 주장한들 결국에는 예정론이 그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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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난제
예정론의 실체를 밝힌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정론이란 피안의 세계 건너편에
있는 난해한 문제인지라 사람의 논리로 풀 수 없는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을 연구할 때 가능하면 예정론과
만나지 않기를 바랬다. 혹시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예정론과 만나더라도 다른 문제들을 연구한 뒤에 가장 늦게 가장 천천히
만나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을 연구하면서 필자는 예정론과의 때 이른 대면을 피할 수 없었다. 예정론의
벽을 넘지 않고서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을 조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때 죽기보다 싫은 마음으로 예정론에
연구를 시작했던 기억이 있다.
참으로 어려운 예정론의 문제를 풀려면 먼저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는 논리적 문제의
해결이요 둘째 성경 난제의 해결이다. 첫 번째 논리적 문제란 예정론을 주장할 때 발생하는 많은 논리적 문제들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예정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하나님은 왜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는가?”라는 질문인데 이에 대한 예정론자들의
대답은 궁색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뜻과 주권에 의해서 그렇다는 것이 저들의 답변이다. 이같은 답변은, “그럼 하나님은
수많은 인간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버리신다는 건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는 모순에 걸려 넘어진다.
두 번째로 성경 난제란, 예정론에 내포된 많은 논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예정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는 말씀의 경우
예정론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말씀으로 제시되지만 예정론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에 대해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회피한다.
위의 두 가지 문제는 예정론 논쟁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난제들이다. 예정론자들은
많은 성경 구절을 근거로 예정론을 주장하고, 그 반대자들은 많은 논리적 모순을 근거로 예정론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면서
양자는 자신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예정론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이 두 가지 난제에 대해 모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예정론을
주장할 때 발생하는 논리적 문제를 해결해야 함은 물론이요, 예정론을 지지하는 듯한 성구들도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점이 바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될 때 예정론은 그 본질을 드러내고 그 숨겨진 정체를 스스로 밝힐 것이다.
이제부터 이 두 가지 난제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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